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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닥속닥/이것저것

머리 속에는 개쩌는 그림이 있는데 손으로 그릴 수 없어! 에 대한 글

by Letssa 렛사 2022. 10. 6.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개쩌는 아이디어가 머리 속에 다 있는데 그림 실력이 별로여서 아직 못 그려." 같은 말을 하는 사람.

사실 먼 과거의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런 건 없다.

그룹과외를 들은 적이 있었다. 거기서 선생님께 들은 말이 있다. '머리 속에 좋은 그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머리 속에 아무것도 없지만, 있다고 생각하는 감정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 아닌 개쩌는 아이디어가 있다는 '감정'일 뿐이라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경험담을 들려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드로잉 실력이 아주 뛰어났기에 생각난 그대로를 그릴 수 있는 분이셨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그려보니 말도 안되는 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나쁜 쪽으로.

나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정말 그랬다. 예전에 짰던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 때 당시에는 '지금은 그림 실력이 안되니 나중에 실력이 될 때 그려봐야지.' 이렇게 생각한 아이디어였다. 그려볼 수는 있겠다 싶은 실력이 되었을 때 그려봤다.

그렇게 밋밋할 수가 없었다. 디테일은 전부 생각도 안하고, 그저 뭉뚱그려 생각한 아이디어였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계속 멈추게 되었다. 화려한 옷? 무슨 장식이 있지? 총? 무슨 총을 들고 있지? 구도 또한 '이건 멋있을거야'라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정말 밋밋했다.

반대의 경우도 딱 한 번 있었다. 아이디어가 약간의 성공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일주일동안 하루종일 그 그림만 생각하며 온갖 디테일까지 다 구상했던 그림이었다. 레퍼런스를 찾아가며 굽힌 다리의 살은 얼마나 닿이는지, 그 곡선은 어떤지, 화면을 채울 요소는 어디에 어떻게 어떤 형태로 들어갈 것인지, 리본의 끝은 어떻게 생겼는지 등등 사소한 것까지 전부 상상한 뒤 그린 그림이었다.
그 때 당시에는 성공했다! 싶었지만 지금의 내가 보면 밋밋하고 어색한 부분 투성이긴 하다. 아직 실력이 썩 좋지 않은 지금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은 자기 실력에 맞는 아이디어를 가진다.

그도 그럴 것이 무언가를 시작하는 초심자들이 가지는 아이디어는 생각보다 비슷비슷하다.

캐릭터를 짠다고 생각하자. 대부분 처음 짜보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쁘고 멋지지만, 뭔가 사연도 있고 왜인지 특별해보이는 캐릭터를 짜고 싶어!'

그렇게 예쁘고 멋지면서 겉으로는 밝지만(가끔은 겉으로도 우울하거나 처연해보인다거나) 속을 알 수 없고 내면은 어둡고 과거에 사연이 있는 캐릭터가 완성된다. 이런 캐릭터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특별한 것을 만들고 싶은 욕심을 다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다 비슷한 것을 만들어 흔하디 흔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그림 또한 비슷하다. 초심자의 특별한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은 당장에 정면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하는데 하이앵글 그림을 꾸역꾸역 그리며 좋은 시도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 당장 완성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데 해보지도 않은 채색법으로 휘갈겨두고 채색법을 시도해봤다 라고 하는 것, 메인스트림과 다른 스타일을 시도해두고 그것 또한 클리셰인 줄 모르면서 난 특이한 게 좋다고 하는 것 등등의 결과를 낳는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특별'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쉽고 평범한 것을 잘 그리는 것 또한 힘들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다. 자신은 특별한 것을 그릴 사람이니 평범한 것은 이미 잘 그릴 수 있다는 감정이 빠져 있는 거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지.

특별한 것을 그릴 것이라는 생각은 기존의 것을 어떻게 잘 표현하여 특별하게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저 '남들과 다른 무언가'라는 실체없는 것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것의 결과는 비슷하다.

그렇다. 다들 처음에는 비슷비슷하다.

그림을 처음 그릴 때 다들 뒷짐지는 캐릭터를 그려보지 않는가. 한 쪽 눈은 꼭 가리고 말이지.

아이디어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에 시작은 다들 비슷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 실체없는 개쩌는 아이디어에 매몰되지 말고, 그것이 별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자. 아이디어라는 건 계속해서 실질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며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좋다.

특히 특별, 남들과 다른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자. 세상은 이미 수많은 시도를 했다. 자신 딴에는 남들과 다르다 생각한 시도가 이미 수만개는 쏟아져나왔던 세상이다. 흔하다고 해서, 클리셰라고 해서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흔히 볼 수 있을 수록 좋은 것일 확률이 높다. 그만큼 검증을 받았다는 뜻이다.

당장에 '개쩌는 아이디어'라는 감정은 그림을 시작하기 위한 씨앗일 뿐이다. 그것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전혀 개쩔지 않으며 발전시키더라도 전혀 좋지 않은 아이디어였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좋은 아이디어는 없으며, 애초에 그릴 수 없는 좋은 아이디어라는 건 실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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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과거에 써놨던 아이디어들 정리하면서 든 생각 써보기...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지 않는 입장에서 쓰기에는 뭐한 글이긴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겠지😋

이제서야 드는 생각인데 처음 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아예 안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남이 하라는대로 다 하는 사람이 제일 빨리 느는 법이지. 시도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는 것 같다.
물론 한 번은 해보고 실패를 맛봐야 아 이게 잘못됐구나~ 싶어서 그런 실수를 안하겠지만...남들이 하지말라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더라.

다행인 건 이런 걸 그림으로 알게 됐으니 다른 분야를 공부할 때 심하게 돌아가는 길은 없을 것 같다는 거? 그렇다고 해서 사람인 이상 저런 경향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안되도록 노력은 좀 해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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